타이완 신궁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타이완 신궁은 일본 제국 시기 대만에 건립된 신사로, 청일 전쟁 이후 일본에 할양된 대만의 통치를 상징하는 역할을 했다. 1895년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친왕의 전사를 기리기 위해 건설이 계획되었으며, 1901년 완공되어 개척 삼신과 요시히사 친왕을 모셨다. 이후 1944년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추가로 봉안하며 신궁으로 승격되었으나, 1945년 일본의 패망과 함께 폐지되었다. 현재는 그랜드 호텔이 자리하고 있으며, 신궁의 유물은 국립 대만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중산구 (타이베이시) - 중앙통신사
중앙통신사는 1924년 중국국민당에 의해 설립되어 타이베이로 이전 후 비영리단체로 전환되었으며, 정부 지원하에 뉴스 기관으로서 중국어, 영어, 일본어, 인도네시아어 뉴스와 포커스 타이완, 타이완플러스 등의 플랫폼을 운영하고 있다. - 중산구 (타이베이시) - 유니 항공
유니 항공은 1988년 마궁 항공으로 설립되어 1996년 현재의 사명으로 변경된 에바 항공의 자회사로, 대만 국내선과 중국 노선을 주로 운항하며 일부 국제선 정기편도 운영하고, ATR 72-600 기종을 운영하며 과거 다양한 기종을 운영했으나 현재는 퇴역했고, 유니 항공 873편 화재 사고를 비롯한 여러 사건·사고를 경험했으며, 여러 항공사와 코드쉐어 협정을 맺고 있다. - 타이베이시의 건축물 - 타이베이 쑹산 공항
타이베이 쑹산 공항은 타이베이시 쑹산구에 위치한 공항으로, 일제강점기 군사 기지로 건설되어 민간 공항으로 재건, 국내선 전용으로 운영되다 2008년 이후 국제 노선을 확대하고 있으며, 도심에 위치하여 접근성이 뛰어나고 첩운과 연결되어 대중교통 이용이 편리하다. - 타이베이시의 건축물 - 중정기념당
중정기념당은 대만 타이베이에 있는 장제스를 기념하는 건축물로, 동상, 전시물, 국립극장 등을 갖추고 있으며, 민주화 운동의 상징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타이완 신궁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명칭 | 타이완 신궁 |
한자 표기 | 臺灣神宮 (정체자) |
일본어 표기 | 台湾神宮 (타이완진구) |
로마자 표기 | Taiwan Jingu |
다른 이름 | 타이완 신사 (臺灣神社) |
상세 정보 | |
위치 | 타이완타이베이시(일본 통치 시대) 다이모미야정 |
좌표 | 좌표 정보 없음 (Google Map 참조) |
격 | 관폐대사 |
창건 | 1901년 (메이지 시대 34년) |
예제 | 10월 28일 |
![]() | |
신사 정보 | |
제신 |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개척3신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친왕 |
2. 역사
1915년, 신사 참배객의 편의를 위해 젠탄산 기슭에 宮ノ下乘降場|미야노시타 정류장|현재의 젠탄 지하철역일본어이라는 기차역이 설치되었다.[1] 1923년 4월 12일, 훗날 쇼와 천황이 되는 황태자 히로히토가 대만을 2주간 순방하면서 타이완 신궁을 방문했다. 이를 위해 勅使街道|칙사 가이도|현재의 중산 북로일본어가 건설되었고, 明治橋|메이지 다리일본어가 지룽강을 가로질러 놓였다.[4]
1914년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참배했고,[8] 1917년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나루히사 왕과 후사코 내친왕 부부가 참배했다. 1926년에는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다이비 도미코가 다시 참배했다.
1944년(쇼와 시대) 아마테라스가 추가로 봉안되면서 신사의 지위가 신궁으로 승격, 타이완 신궁으로 개칭되어 대만에서 가장 높은 등급의 신사가 되었다.[3] 내무성은 1944년 6월 17일,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모시고 '''대만 신궁'''으로 이름을 바꾸는 것을 고시했다.[9] 새로운 신사 개회식은 10월 28일로 계획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23일, 여객기가 타이완 신궁이 있는 산 정상에 추락하여, 신사 건물, 도리이, 석등 등이 소실되고 신사의 약 절반이 심하게 파손되었다.[5]
1945년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한 직후, 대만에 있는 모든 신사는 폐지되었다. 타이완 신궁은 완전히 수리되지 않았고, 신사의 많은 자재는 다른 건설 프로젝트에 사용되었다. 그 자리에는 그랜드 호텔이 1952년에 건설되었으며, 현재도 이 도시의 중요한 랜드마크로 남아 있다.[3]
2. 1. 건립 배경
1895년 기타시라카와 요시히사 친왕이 사망한 후, 대만 총독 노기 마레스케는 요시히사를 기리기 위한 신사 건립을 계획했다.[1][2] 처음에는 위안산 공원(현재 타이베이 엑스포 공원의 일부)에 신사를 건설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노기의 후임인 고다마 겐타로와 수석 계획가 고토 신페이는 더 높은 고도를 확보하기 위해 지룽강 건너편의 젠탄산()으로 신사 위치를 변경했다. 이 위치는 신사가 도시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게 하여 일본 제국의 식민 지배를 상징하는 역할을 했다.[1][2]1900년부터 1901년 사이에 건설이 진행되었으며, 완공된 신사는 요시히사와 開拓三神|개척 삼신일본어에게 봉헌되었다.[3]
일본 국내에서는 1896년 1월 13일, 귀족원에서 네기시 다케카를 발의자로 하여 "국비로 대만에 신사를 건설하는 건의안"이 제출되었고, 도쿠가와 이에사토 공작 등 43명의 찬성을 얻었다. 같은 해 3월 25일, 중의원에서도 "별격 관폐사를 대만에 건설하는 건의"가 기타하라 노부쓰나 등 2명에 의해 제출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에 따라 노기 마레스케 전 총독은 1897년 9월 1일, "고(故)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전하 신전 건설 조사 위원회"를 설치하고, 가쿠타 히데마쓰 해군 중장, 나카야마 나가아키 해군 대좌 등에게 위원 등을 위촉했다. 위원들은 타이페이, 지룽, 타이난의 땅을 검토하여, 당초에는 타이페이의 위안산(圓山)을 예정했지만, 고다마 겐타로 남작과 고토 신페이 민정 장관과의 상담 결과, 지룽강 맞은편의 젠탄산(劍潭山중국어)으로 결정되었다.
1899년 2월, 신사의 토목 공사가 시작되었고, 1900년 5월 28일에는 사당 등의 건축 공사가 시작되어 1901년 10월 20일에 준공되었다. 공사와 병행하여 1900년 7월 14일, 고다마 겐타로 남작은 개척 삼신 1좌와 요시히사 친왕 1좌를 모시고 "臺灣神社"로 관폐대사에 올리도록 건의했다. 같은 해 9월 18일, 내무성은 대만 신사 창건을 인정하고 고시했다.[7]
당시 젠탄산의 지질은 사암이었으며, 공사는 신사 건설과 가교로 분담되었다. 사당 건축에는 기소 산을 중심으로, 오와리, 기이, 야마토, 도사의 노송나무 재가 사용되었다. 한편 철교는 길이 약 91.44m, 폭 약 11.89m로, 중앙을 마차길, 좌우를 인도(人道)로 하고, 난간에는 오동나무 잎이 장식되어 "'''메이지 다리'''"라고 명명되었다.
1901년 10월 27일, 관폐대사 "대만 신사"의 진좌식이 거행되었다.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다이비 도미코 및 도쿠가와 이에사토 공작, 다테 무네노리 후작 등 600명 이상이 참례하는 가운데, 칙사에 의한 진좌식이 거행되었다. 다음 날 28일에는 고다마 총독을 봉폐사로 하여 대제가 집행되었고, 일반 시민도 참배하여 전날과 이틀 동안 6만 5000명이 참배했다.
1915년, 신사를 위해 젠탄산 기슭에 宮ノ下乘降場|미야노시타 정류장일본어(현재 젠탄 지하철역)이라는 기차역이 설치되었다.[1] 1923년 4월 12일, 3년 후 쇼와 천황이 되는 황태자 히로히토가 대만을 2주간 순방했다. 신사 방문을 준비하기 위해 勅使街道|칙사 가이도|현재 중산 북로일본어가 도시에서 신사로 이어지도록 건설되었으며, 明治橋|메이지 다리일본어가 지룽강을 건너게 되었다.[4]
1944년 아마테라스가 봉안되면서 신사의 지위가 신궁으로 승격되어 대만에서 가장 높은 등급의 신사가 되었다.[3]
2. 2. 건립 과정
1895년 기타시라카와 요시히사 친왕이 사망한 후, 대만 총독 노기 마레스케는 그를 기리기 위한 신사 건립을 계획했다. 원래 위안산 공원(현재 타이베이 엑스포 공원의 일부)에 신사를 건설할 예정이었으나, 노기의 후임인 고다마 겐타로와 수석 계획가 고토 신페이는 더 높은 고도를 위해 지룽강 건너편의 젠탄산()으로 신사 위치를 변경했다. 이 위치는 신사가 도시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게 하여 일본 제국의 식민 지배를 상징하는 역할을 했다.[1][2] 1900년에서 1901년 사이에 건설이 진행되었으며, 완공된 신사는 요시히사와 開拓三神|개척 삼신일본어에게 봉헌되었다.[3]1915년, 신사 참배객을 위해 젠탄산 기슭에 宮ノ下乘降場|미야노시타 정류장|현재 젠탄 지하철역일본어이라는 기차역이 설치되었다.[1] 1923년 4월 12일, 훗날 쇼와 천황이 되는 황태자 히로히토가 대만을 2주간 순방했다. 신사 방문을 준비하기 위해 勅使街道|칙사 가이도|현재 중산 북로일본어가 도시에서 신사로 이어지도록 건설되었으며, 明治橋|메이지 다리일본어가 지룽강을 가로질러 건설되었다.[4]
1944년(쇼와 19년) 아마테라스가 봉안되면서 신사의 지위가 신궁으로 승격되어 대만에서 가장 높은 등급의 신사가 되었다.[3] 새로운 신사 개회식은 10월 28일로 예정되었다. 그러나 1944년 10월 23일, 화물기가 통제력을 잃고 타이완 신궁이 위치한 산 정상에 추락하여 신사의 약 절반이 심하게 파손되었다.[5] 신사는 제2차 세계 대전 후 일본의 항복으로 인해 완전히 수리되지 않았고, 신사의 많은 자재가 다른 건설 프로젝트에 사용되었다. 그 자리에 그랜드 호텔이 1952년에 건설되었으며, 현재도 이 도시의 중요한 랜드마크로 남아 있다.[3]
청일 전쟁의 결과, 시모노세키 조약에 의해 대만이 청나라에서 대일본 제국으로 할양되었다. 1895년(메이지 28년, 광서 21년)4월 17일부터 1945년(쇼와 20년, 민국 34년)10월 25일까지 5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대만은 일본의 통치 하에 있었다.
할양된 대만에 대만 정벌근위 사단장으로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친왕이 출정했지만, 1895년(메이지 28년)10월 28일, 타이난에서 전사했다. 황족 군인 최초의 외국에서의 순직이었다. 이듬해 1896년(메이지 29년)1월 13일, 귀족원에서 네기시 다케카를 발의자로 하여 "국비로 대만에 신사를 건설하는 건의안"이 제출되었고, 도쿠가와 이에사토 공작 등 43명의 찬성을 얻었다.
일본 국내에서의 움직임을 받아 노기 마레스케 전 총독은 1897년(메이지 30년)9월 1일, "고(故)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전하 신전 건설 조사 위원회"를 설치하고, 위원들을 위촉했다.
직책 | 이름 |
---|---|
해군 중장 | 가쿠타 히데마쓰 |
해군 대좌 | 나카야마 나가아키 |
육군 소좌(보병) | 기쿠치 주덴 |
대만 총독 비서관 | 키무라 쿄 |
대만총독부 민정국 사무관 | 다카쓰 신 |
대만총독부 민정국 사무관 | 요코자와 지로 |
위원들은 타이페이, 지룽, 타이난의 땅을 검토하여, 당초에는 타이페이의 위안산(圓山)을 예정했지만, 제4대 대만 총독고다마 겐타로남작이나 고토 신페이민정 장관과의 상담 결과, 지룽강의 맞은편에 있는 劍潭山|젠탄산중국어으로 결정했다.
1899년(메이지 32년)2월, 신사의 토목 공사에 착공했다. 사당 등의 건축 공사는 이듬해 1900년(메이지 33년)5월 28일에 착공하여, 1901년(메이지 34년)10월 20일에 준공되었다.
공사와 병행하여, 1900년(메이지 33년)7월 14일, 고다마 겐타로 총독은 개척 삼신 1좌와 요시히사 친왕 1좌를 모시고 "臺灣神社"로 관폐대사에 올리도록 건의했다. 같은 해 9월 18일, 내무성은 대만 신사 창건을 인정하고 고시했다.[7]
당시의 지질은 사암이며, 공사는 신사 건설과 가교로 분담되었다. 사당의 건축은 땅을 깊이 파서 행해졌고, 노송나무 재가 사용되었다. 한편 철교는 길이 약 91.44m, 폭 약 11.89m로, 중앙을 마차길, 좌우를 인도(人道)로 하고, 난간에는 오동나무 잎이 장식되어 "'''메이지 다리'''"라고 명명되었다.
10월 20일, 칙사 미야지 이쓰오 장전과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다이비 도미코 및 그 측근들이 장갑 순양함 아사마에 승선하여, 24일 오전 10시에 지룽항에 도착했다. 악천후 속에서 고다마 총독, 무라카미 요시오타이페이현 지사, 하세가와 킨스케대만총독부 철도부 기술장, 마쓰오카 벤대만총독부 민생부 현지 과장 등 문무 고관들이 영접했다.
10월 27일, 관폐대사 "대만 신사"의 진좌식이 거행되었다. 다음 날 28일, 고다마 총독을 봉폐사로 하여 대제가 집행되었다. 고다마는 축사를 낭독하고, 다마구시를 봉납했다. 이후 도미코 비가 다마구시를 바치고 배례,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나루히사 왕이 대배하고, 참례원들이 참배하여 의식이 종료되었다.
1914년(다이쇼 3년)2월 18일,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참배했다.[8]
1917년(다이쇼 6년)10월 28일 및 11월 2일, 요시히사 친왕의 자손인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나루히사 왕과 동비 후사코 내친왕 부부가 참배했다.
1923년(다이쇼 12년)4월 17일, 황태자 히로히토 친왕(후의 쇼와 천황)이 대만 행차 시, 대만 신사에 참배했다.
1926년(다이쇼 15년)10월 28일 및 11월 1일、기타시라카와노미야 다이비 도미코가 다시 참배했다.
1944년(쇼와 19년)6월 17일,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증사와 '''대만 신궁'''으로의 개칭이 내무성으로부터 고시되었다.[9] 같은 해 10월 23일, 대만 신궁이 있는 위안산의 산꼭대기에 여객기가 추락하여, 새로 조성되어 대만 신사 제례 때 천좌될 예정이었던 신사(新社殿)나, 도리이, 석등 등을 소실했다.
1945년(쇼와 20년)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한 직후, 대만에 있는 모든 신사는 폐지되었다. 대만 신궁의 자리는 타이완 대반점(대만 호텔)이 되었고, 1952년에 개축되어 위안산 대반점이 되었다.
2. 3. 신사 운영과 증축
1895년 기타시라카와 요시히사 친왕이 사망한 후, 대만 총독 노기 마레스케는 요시히사를 기리기 위한 신사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원래 계획은 위안산 공원(현재 타이베이 엑스포 공원의 일부)에 신사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기의 후임인 고다마 겐타로와 수석 계획가 고토 신페이는 더 높은 고도를 위해 지룽강 건너편의 젠탄산()으로 신사를 옮기기로 결정했다. 이 전망대는 신사가 도시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게 하여 일본 제국의 식민 지배를 상징하게 했다.[1][2] 1900년에서 1901년 사이에 건설이 진행되었으며, 완공된 신사는 요시히사와 開拓三神|개척 삼신일본어에게 봉헌되었다.[3]1915년, 신사를 위해 젠탄산 기슭에 宮ノ下乘降場|미야노시타 역|현재 젠탄 지하철역일본어이라는 기차역이 설치되었다.[1] 1923년 4월 12일, 3년 후 쇼와 천황이 되는 황태자 히로히토가 대만을 2주간 순방했다. 신사 방문을 준비하기 위해 勅使街道|칙사 가이도|현재 중산 북로일본어가 도시에서 신사로 이어지도록 건설되었으며, 明治橋|메이지 다리일본어가 지룽강을 건너게 되었다.[4]
1944년(쇼와 19년) 아마테라스가 봉안되면서 신사의 지위가 신궁으로 승격되어 대만에서 가장 높은 등급의 신사가 되었다.[3] 새로운 신사의 개회식은 10월 28일로 계획되었다. 그러나 1944년 10월 23일, 화물기가 통제력을 잃고 타이완 신궁이 위치한 산 정상에 추락하여 신사의 약 절반이 심하게 파손되었다.[5] 신사는 제2차 세계 대전 후 일본의 항복으로 인해 완전히 수리되지 않았고, 신사의 많은 자재가 다른 건설 프로젝트에 사용되었다. 그 자리에 그랜드 호텔이 1952년에 건설되었으며, 현재도 이 도시의 중요한 랜드마크로 남아 있다.[3]
2. 4. 2차 세계 대전과 신궁 소실
1944년(쇼와 시대) 아마테라스가 봉안되면서 타이완 신궁의 지위는 신궁으로 승격되어 대만에서 가장 높은 등급의 신사가 되었다.[3] 새로운 신사의 개회식은 10월 28일로 계획되었다. 그러나 1944년 10월 23일, 화물기가 통제력을 잃고 타이완 신궁이 위치한 산 정상에 추락하여 신사의 약 절반이 심하게 파손되었다.[5] 신사는 제2차 세계 대전 후 일본의 항복으로 인해 완전히 수리되지 않았고, 신사의 많은 자재가 다른 건설 프로젝트에 사용되었다. 그 자리에 그랜드 호텔이 1952년에 건설되었으며, 현재도 이 도시의 중요한 랜드마크로 남아 있다.[3]3. 제신
1944년(쇼와 19년) 이후 타이완 신궁의 제신은 다음과 같이 3좌 5주였다.
-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9] (1944년(쇼와 19년)에 증사)
- 개척 삼신[9]
- * 오쿠니누시노 미코토[9]
- * 오아나무치노 미코토[9]
- * 스쿠나비코나노 미코토[9]
-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친왕[9]
4. 신사의 역할과 영향
타이완 신궁은 대만의 총진수(總鎭守)로서 대만에서 가장 중요한 신사로 여겨졌다. 대만총독부는 10월 28일을 '타이완 신사제'로 지정하고 이날을 섬 전체의 공휴일로 했다. 제례는 기년(祈年), 신상(新嘗), 예제(例祭) 외에도 매년 6월 17일, 시정 기념제(始政記念祭)가 집행되었다. 당일, 대만총독부에서 총독이 참향(參香)하여 폐백(幣帛)을 봉납하고 섬 전체의 평온을 기원했다.[9]
신사 입구에 놓여 있던 청동 소 조각상은 현재 국립대만박물관 부지 내에 설치되어 있다.
1914년 2월 18일에는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참배했다.[8]
1917년 10월 28일 및 11월 2일에는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친왕의 자손인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나루히사 왕과 후사코 내친왕 부부가 참배했다. 후사코 내친왕은 의붓아버지를 추모하며 와카(和歌)를 읊었다.
1923년 4월 17일에는 황태자 히로히토 친왕(후의 쇼와 천황)이 대만 행차 때 대만 신사에 참배했다.
1926년 10월 28일 및 11월 1일에는 도미코가 다시 참배했다.
4. 1. 식민 통치 도구
청일 전쟁 결과, 시모노세키 조약에 의해 대만이 청나라에서 대일본 제국으로 할양되었다. 1895년 4월 17일부터 1945년 10월 25일까지 5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대만은 일본의 통치 하에 있었다.1895년 10월 28일, 대만 정벌에 나선 근위 사단장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친왕이 타이난에서 전사했다. 그는 황족 군인 최초로 외국에서 순직한 인물이었다. 이듬해 1896년 1월 13일, 귀족원에서 네기시 다케카 발의로 "국비로 대만에 신사를 건설하는 건의안"이 제출되어 도쿠가와 이에사토 공작 등 43명의 찬성을 얻었다. 같은 해 3월 25일, 중의원에서도 기타하라 노부쓰나 등 2명이 "별격 관폐사를 대만에 건설하는 건의"를 제출했다.
1897년 9월 1일, 노기 마레스케 전 총독은 일본 국내의 움직임에 따라 "고(故)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전하 신전 건설 조사 위원회"를 설치하고 위원을 위촉했다.
1944년 6월 17일,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추가로 모시고 '''대만 신궁'''으로 개칭한다는 내용이 내무성 고시로 발표되었다.[9] 1945년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한 후, 대만의 모든 신사는 폐지되었다.
4. 2. 화폐 도안


타이완 신궁은 대만에서 일본 엔화를 발행했던 대만 은행 지폐 대부분에 도안으로 사용되었다.
5. 현재
타이완 신궁은 현재 존재하지 않으며, 그 터에는 다른 시설이 들어섰다.
5. 1. 유물
경내는 10만여 평이었으며, 여러 집안에서 헌납된 등롱 27기와 화강암으로 된 큰 도리이 등이 있었다.6. 황족 및 왕공족의 참배
타이완 신궁에는 황족 및 왕공족들이 참배했다. 참배 시기는 주로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친왕의 기일이자 예대제인 10월 28일과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로 대만이 일본에 할양된 4월 17일 전후가 많았다. 요시히사 친왕을 모시는 타이난 신사를 함께 참배하는 경우도 많았다.
참배일 | 참배자 | 비고 |
---|---|---|
1901년 10월 27일, 10월 28일, 10월 30일 |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다이비 도미코 | [5]11월 4일에 타이난 신사에도 참배. |
1908년 10월 28일 | 칸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 | [5] |
1910년 6월 16일 | 기타시라카와노미야가의 데루히사 왕 | [5]요시히사 친왕의 아들. 6월 17일에 타이난 신사에도 참배. 다음 달에 신적강하. |
1916년 4월 17일 | 칸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 동비 지에코 | [5] |
1917년 10월 28일, 11월 2일 |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나리히사 왕, 동비 후사코 내친왕 | [5]나리히사 왕은 요시히사 친왕의 아들, 후사코 내친왕은 메이지 천황의 황녀. 10월 26일에 타이난 신사에도 참배. |
1920년 10월 20일, 10월 28일 | 구니노미야 구니요시 왕, 동비 기미코 | [5] |
1923년 4월 17일 | 황태자 히로히토 친왕 | [5]대만 행차 때 참배. 4월 20일에 타이난 신사에도 참배. |
1925년 5월 30일 |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 | [5] |
1926년 4월 16일 |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 | [5]같은 해 4월 10일, 타이난 신사에도 참배. |
1926년 10월 28일, 11월 1일 |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다이비 도미코 | [5] |
1927년 11월 3일 |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왕 | [5]같은 해 11월 1일, 타이난 신사에도 참배. |
1928년 4월 2일 | 구니노미야가의 아사아키 왕 | [5] |
1928년 4월 28일 | 구니노미야 구니요시 왕 | [5]이 참배 중 타이중 불경 사건 발생. |
1928년 5월 6일 |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 | [5] |
1929년 5월 13일 | 후시미노미야가의 히로요시 왕 | [5] |
1929년 10월 24일 | 히가시후시미노미야 비 슈코 | [5] |
1931년 6월 6일 | 가야노미야 쓰네노리 왕 | [5] |
1933년 7월 4일 | 구니노미야 아사아키 왕 | [5] |
1934년 9월 23일 |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 | [5] |
1934년 11월 1일 |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 | [5] |
1935년 1월 18일 | 이왕 은 | [5] |
1935년 2월 26일 | 구니노미야 아사아키 왕 | [5] |
1935년 2월 27일 | 아사카노미야가의 마사히코 왕 | [5]해군병학교 연습함 야쿠모에 기항, 소위 후보생 동반. |
1935년 2월 28일 | 후시미노미야가의 히로히데 왕 | [5]해군병학교 연습함 아사마에 기항, 소위 후보생 동반. |
7. 칙사 가도
1923년 4월 17일, 황태자 히로히토 친왕(훗날의 쇼와 천황)이 대만 행차 때 대만 신사를 참배했다.[9] 이때 칙사 가도(현재 중산 북로)가 건설되었다.
칙사 가도는 삼선로의 타이베이시청 앞 광장(현 행정원)에서 북쪽으로 뻗어 대만 신궁 앞 메이지 다리 남쪽 끝까지 이어지는 3190m 길이의 참배 도로였다. 어성(御成) 가도라고도 불렸다.
8. 교통
타이베이 첩운 단수이선 궁노시타역에서 내려 도보 5분 거리에 있다.
참조
[1]
서적
永遠的北淡線
玉山社
[2]
간행물
第四章 日治時期臺灣各級神社的選址與設域的空間特性
http://rportal.lib.n[...]
National Taiwan Normal University
2020-05-31
[3]
웹사이트
臺灣神社誌
https://www.th.gov.t[...]
2020-05-31
[4]
웹사이트
我們住在「中國的地圖」裡?台北路名藏著滿滿的台灣過往
https://www.gvm.com.[...]
天下文化
2020-05-31
[5]
웹사이트
淺談臺灣今昔地圖與歷史航照在中學地理資訊教育的意義
http://epaper.ntu.ed[...]
National Taiwan University
2020-05-31
[6]
간행물
殿堂入りの人々を語る(17)「わが父・サブちゃん」
https://baseball-mus[...]
野球体育博物館
2022-08-16
[7]
문서
明治33年内務省告示第81号(『官報』第5165号、明治33年9月18日)
https://dl.ndl.go.jp[...]
[8]
논문
植民地在住者の政治参加をめぐる相剋「台湾同化会」事件を中心として
https://researchmap.[...]
[9]
문서
昭和19年内務省告示第374号(『官報』第5227号、昭和19年6月19日)
https://dl.ndl.go.jp[...]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